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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농사는 언제부터 지었을까 – 강근숙


벼농사는 언제부터 지었을까. 실낱같은 모를 심은 논바닥을 보면서 저게 언제 자라 알곡을 매달까 했는데, 어느새 들판이 누렇게 물들어간다. 벼 이삭이 올라오면 또 한 해가 간거라는 어른들 말씀을 떠올리며 세월의 빠름을 실감한다. 도시와 농촌 복합도시인 파주는 어디를 가더라도 계절이 바뀌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인조 장릉으로 해설가는 길은 버스에서 내려 20여 분 걸어야 하는데, 가을 햇살 아래 알곡이 익어가는 들판을 가로질러 걷노라면 추수를 앞둔 농부의 마음처럼 넉넉해진다.

탄현면 갈현리 들판에는 벼 수확이 한창이다. 콤바인의 기능은 익히 알고 있으나, 가까이 가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낫으로 베고 햇볕에 말려 탈곡을 하느라 몇 날 며칠 걸렸는데, 콤바인이 논바닥을 이동하는 대로 알곡을 거두고 볏짚은 논바닥에 가지런히 누인다. 비바람에 쓰러진 것은 잘게 부수어 거름으로 뿌려지고, 수확한 벼는 트럭 위 큰 자루로 옮겨지는 것을 보면서, 벼를 베는 일과 터는 일을 한꺼번에 하는 종합 수확기는 이삼십 명 일꾼 역할을 능히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내 땀 흘린 농부들은 수확하는 것도 큰일이다. 동네 남정네들이 동원되어 지게로 볏단을 져 날라 날가리를 쌓는다. 타작하는 날은 등잔불을 켜놓고 새벽밥을 먹었다. 페달을 밟는 탈곡기 소리와 일꾼들이 시끌벅적한 마당에는 알곡이 수북하게 쌓여간다. 갈퀴로 검불을 걷어내고 풍구를 불려가며 가마니에 담던 정겨운 모습은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농부들의 손길이 88번 닿아야 쌀 한 톨이 나온다 해서 쌀 미(米)자를 (八十八) 이렇게 썼다는데, 지금은 농촌도 기계화되어 모를 내고 수확하는 고된 일을 단 하루에 끝내는 편한 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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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벼농사를 언제부터 지었을까. 가장 오래된 볍씨가 있다는 ‘고양 가와지박물관’을 찾아갔다. 박물관 마당에는 측우기, 혼천의 등 선조들의 과학기술을 엿볼 수 있는 천문관측기구 모형이 세워졌고, 화분마다 심어놓은 가와지 벼가 익어가고 있었다. 고양시 해설사는 가와지 벼 이삭과 테블릿피시를 이용해 자세하게 설명을 한다. 1991년 일산 신도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5천년 전, 볍씨와 구석기부터 철기시대까지 광범위한 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고양가와지볍씨 박물관 마당

나무와 꽃가루, 개 이빨도 나왔으며, 격지, 톱니날, 덧띠토기, 가락바퀴, 주먹도끼, 찍개, 밀개, 몸돌, 빗살무늬 석기 등은 신석기 이전의 농경문화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가와지란 이름은, 발굴 장소에 자리한 김수원 선생 댁 당호가 가와지(家瓦地)였기에 ‘가와지 볍씨’라 명명했다. 당시 대화동 일대에서 1차 발굴 때 가장 먼저 토탄층에서 찾아낸 나무 기둥은 가래나무였고, 2.3일째 되는 날 볍씨 한 톨을 찾아냈다. 얼마나 기뻤을까. 발굴 조사단과 지질조사연구원팀은 힘든 작업 끝에 11톨의 볍씨를 더 발견하여 미국 베타연구소로 보내 성분을 분석한 결과 5,020년 전의 것으로 연대가 확인되었다.

관심을 끈 것은 야생 벼가 아니고 ‘재배 벼’라는 사실이다. 2001년 11월, 박물관 개관에 맞추어 한, 중, 일 동아시아 삼국의 벼 전공 학자들이 모여 가와지 볍씨 위상을 인정하는 국제회의를 가졌다. 전시실에는 실제 5천 년 전 볍씨 5톨이 전시되어 있었다. 토탄층에 묻힌 볍씨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썩지 않는 것은 산소 없는 서늘한 진흙 속에서 미생물의 활동을 억제되기 때문이다.

고양가와지 볍씨 박물관 마당

1차 발굴 때 토탄층에서 찾아낸 벼 낟알을 증유수에 담가서 부드러운 붓으로 씻어 실온에서 건조한 뒤, 낟알 모양의 특성을 살피고자 길이와 폭을 확대 투영기를 이용하여 측정하고 사진 촬영을 했다. 가와지 볍씨가 발굴되기 전에 일본은 한민족으로부터 벼농사가 전해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마이니치 신문 문화면에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약 5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고 크게 보도하여, 쌀농사의 기원을 밝히는 한편, 한민족이 일본에 벼농사를 전수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5천년전, 가와지 볍씨

1997년 11월, 가와지 볍씨보다 더 오래된 ‘소로리 볍씨’가 충북 청원군 옥산면 오창 과학산업단지 발굴현장에서 발견되었다. 미국의 권위 있는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기관인 지오크론 연구실에서 측정한 결과, 소로리 볍씨의 연대는 1만 5천 년 이전으로 확인되었다. 가와리 볍씨는 소로리 볍씨로부터 전해져 재배된 것으로, 유전학적으로 가와리 볍씨의 조상이 아닐까 추정한다.

소로리 볍씨가 발견되기 전까지 중국 후난성에서 출토된 1만 1천 년 전 볍씨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았으나, 소로리 볍씨는 그보다 수천 년이나 앞서 중국이 한반도에 벼농사를 전수했다는 기존 학설이 뒤집혔다. 소로리 유적지에서는 볍씨와 함께 석기와 석기 제작터도 발견되었다. 주먹대패, 긁개, 밀개, 홈날, 톱니날, 뚜르개, 격지, 망치돌 등 다양한 종류의 석기 출토는 한민족 농경문화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우리 선조들의 농경문화는 매우 발달했다.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배달국 염제신농은 농업의 시조로 나무를 깎아 쟁기와 호미 등의 농기구를 만들고, 농경법을 개발하여 곡식을 심고 채소를 재배하는 법을 가르쳤다 전한다. 고조선이 건국되기 이전, 환웅천왕이 배달국을 다스리던 때부터 농사를 짓고 살았음을 알려준다.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동이족의 조상인 염제신농을 농업의 신으로 모시고 선농단(先農壇)에 제향을 올렸으며, 지금도 매년 경칩 지난 길일에 선농대제를 봉행한다. 동대문구 ‘선농단 역사문화관’은 옛 선농단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전시실에는 조선의 왕이 행차하여 천제를 올리고 친히 논을 가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였고, 쟁기, 괭이, 가래, 써래, 갈퀴, 호미, 도리깨, 삼태기 등 전통 농기구를 전시해 놓았다.

파주의 쌀 ‘한수위와 참드림’은 탄현 쌀과 장단 쌀을 포함한다. 파주는 임진강 유역의 비옥한 토양과 기후 조건을 갖춘 청정 환경에서 재배하여 품질 뛰어나고 맛이 좋아 임금님께 진상하던 쌀이다. 지금도 파주 쌀은 귀한 대접을 받으며, 학생들 급식과 군부대로 공급된다. 가와지 쌀은 단순 고양시 브랜드가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와지1호 볍씨, 12톨 중 5톨

가와지 쌀은 농업기술원에서 가와지 1호 볍씨의 DNA를 분석하고 현대 벼와 교배하여 개발한 품종이다. 가와지 쌀은 일반미보다 알이 잘았고, 찹쌀에 가까울 정도로 흰빛이 돌았다. 5천 년 전, 농부의 숨결을 느끼며 생쌀을 꼭꼭 깨물어본다. 단맛이 나면서도 고소했다. 여린 모가 논에 뿌리를 내려, 농부의 땀방울이 여물어 추수할 때는 ‘벼’라 하고, 탈곡해서 찧으면 ‘쌀’, 아낙이 불을 지펴 익히면 ‘밥’이라 하는 그 밥에는 민족의 생활과 철학이 담겨있다. 우리는 날마다 밥을 먹으며 살아간다. 어른들은 ‘밥이 보약이다’ ‘밥심으로 산다’며 끼니를 거르지 말 것을 당부했고, ‘밥은 먹고 사냐’ ‘밥값을 해야지’ 하며 자손들 안부를 물었다. 지금은 쌀이 남아돌아 귀한 줄을 모르지만, 쌀 한 톨을 금싸라기처럼 여기던 시절에는 만나면 ‘밥 먹었니’ 묻는 것이 인사였다.

가와지 쌀로 이밥을 한 솥 지었다. 5천 년 전 볍씨가 쌀이 되고 밥이 되었다. 이름 있는 쌀밥을 혼자 먹을 수 없어. 이웃을 불러 밥상에 둘러앉았다. 부드럽고 찰진 밥이 입안에 착착 감긴다. 나는 ‘맛있지 맛있지’하며 한 그릇을 비웠고, 앞에 앉은 여인도 ‘정말 맛있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서먹하던 사이도 밥을 같이 먹다 보면 정이 들고 가까워진다. 한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이 ‘한솥밥 먹는 사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길을 가는 피붙이 같은 존재라는 뜻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아이들과 밥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사랑과 인성을 키우는 밥상머리 교육을 선호한다. 세상에 먹을거리가 넘쳐나도 정이 담긴 따뜻한 밥 한 그릇만 하겠는가. 농부의 땀과 자연의 순환이 들어있는 밥 한 그릇은,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고 힘을 얻는 생명의 원천이다. 가와지 볍씨는 한반도 인류 진화를 알려주는 삶의 기록이며, 진흙 속에 묻혀 5천 년을 꺼지지 않은 맥박이요 숨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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