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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짝 지근훈을 생각하며

이 내용은 미국으로 이민간 광탄 출신 주 일님께서 파주위키의 ‘1965년 신산산리 장터 폭발물 사고’ 게시물에 댓글로 작성된 글이다. 댓글을 작성한 주 일님은 신산초교 36회로 40년전 이민가서 현재 뉴욕에 거주하는 것으로 소개됐다.

내가 신산국민학교 6학년 이었고 장날 토요일 반공일에 친구들과 시장을 둘러보고 대장간에 멈추어 대장간 일하는 것을 신기하게 구경 했고 그날은 포탄 두발이 있어서 대장간서 포탄을 달구어 백금을 추출한다고 했는데 친구들과 위험하다는 이야기 하며 집으로 떠났다.

항상 두명의 대장간 아저씨가 일했는데 그들이 코크스 불에 포탄을 넣고 풀무질 했다고 들었다.
당시는 폭우가 쏟아지면 서래울 마을 산 계곡에서 625때 사용하다 매몰되어 방치된 포탄 (주로 81mm 박격포탄)이 수백발씩 노출되어 지서에 신고하고 자유의 벗 책자를 얻고 어떤 때는 학용품을 받기도 했다.

그때 포탄은 155mm 였고 상태로 보면 미군이 포사격 때 사용하다 분실 또는 방치되어 민간이 취득한 것이 꽤 되던 시절이었다.
내 집이 있는 문산천에서 북녘 사격장으로 쏘는 포격훈련을 엄청나게 보던 시절이고 그런 때 미군이 잃어버리고 간 것으로 보면 맞는다.

나와 같은 책상에서 공부하는 친구 지근훈 이 그날 폭발로 신체가 날아갔고 3km 거리의 집에 거의 도착하기 전 두발의 포탄이 터졌고 포사격으로 생각했는데 버스에서 내린 어른들이 신산리 시장서 폭발사고로 난리 났다는 얘기를 듣는데 두시간 되었을 즈음 서울에서 온 차량에서 호외를 뿌려 읽고 자세히 알게 되었다.

이틀 후 월요일 등교 길에 대장간 앞에 가보니 그 앞 장터 입구에 하얀 종이로 싼 관이 열개 넘게 놓여 있었고 나의 짝 지근훈 이름도 있어서 슬퍼하며 학교로 갔고 그 다음날 친구 가족 위로하러 선생님과 친구들이 쌀, 돈, 모금해서 갔을 때 나는 짝을 잃은 슬픔에 가지 않았다.

폭발사고 20년 후 1985년 뉴욕으로 이민을 와서 사십년이 흘렀지만 그때 생각에 인터넷서 찾아보다가 목격자 내가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나는 이리역 화약열차 폭발때 이리시 마동에 있었고 역전으로 구조하러 갔었고 뉴욕시 쌍둥이 빌딩 폭파 때는 나의 자영업 회사 출근을 멈추고 맨하탄으로 구조하러 달리다가 교통정체로 빌딩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 슬퍼한 산증인이기도 하다.

내 이름은 외자로 신안 주씨 한 일로 주 일 이며 신산국민학교 36회, 방축 1리 (검전리) 서울식당 둘째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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