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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인이 되었을 때 -김선희

마종기의 “내가 시인이 되었을 때”를 읽고

내가 시인이었을 때

그러니까 내가 초록이었을 때

가는 곳마다 꽃향기가 넘치고

바람은 빈 들판을 요란하게 달리면서

평생의 꿈가지 흔들며 춤추었지.

그러다가 내가 아직 시인이었을 때

청하는 대로 술 취해 노래했는데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어.

불안한 눈물도 흐르지 못하고

눈치보며 얼굴을 떠나지 못했어.

나무와 풀과 꽃이 칼이 되어

내 온몸을 얼리며 위협하고 

머물러 살 자격이 없다고 고함질렀어.

내가 좇겨 가야할 곳은 어디였을까,

시베리아나 고비사막 같은 곳?

약을 먹어도 우울증은 뽑히지 않았다.

내가 한때 시인이었을 때 

슈베르트의 오중주가 내게 안겼고

폴 테일러의 무용은 음악을 감싸면서

안온한 서재의 배경이 되었지.

무용이 꺼지고 음악이 떠나고 

잠에서 깨어나 숨을 몰아쉬니

나는 더 이상 젊은 초록이 아니었다.

내가 오색 풍선 날리는 시인이었을 때

어느 집 뒤뜰의 잡풀이란 걸 몰랐다.

낭비한 시름이 허세를 다 지우면

다시 한번 거칠 것 없는 시인,

자유롭고 외로운 넋의 시인을 찾아

그래, 눈떠라.

감추어둔 내 안의 물길이 

소리 내며 흐르는 새벽녘,

길 잃은 환자가 되지 않기 위해

풀잎 사이 이슬에게 동행을 청한다.

그래서 긴 고통을 이긴 시인이었을 때.

시평

이 작품은 마종기 시인의 삶과 문학적 고뇌에 대한 김선희 작가의 깊은 공감과 오마주다. ‘의사이자 시인’으로 살며 겪어야 했던 마종기 특유의 정체성 혼란, 이국 땅에서의 근원적 외로움과 우울증을 마치 자신의 내면 풍경처럼 생생하게 육화해냈다. 젊은 날의 허황된 꿈(오색 풍선)을 터뜨리고 스스로를 낮은 ‘잡풀’로 인식하며, 선배 시인이 먼저 걸어간 지난한 고통의 길에서 진정한 시 정신을 배우고 동행하겠다는 결연한 다짐이 새벽 이슬처럼 맑게 빛난다. pajuwiki_ai


들배지기

발색이 시작된다 무겁고 느린 

깊은 침묵 흐르다 겨우내 묵은김치 항아리 깨끗이 비우듯 

들끓던 여름을 밑바닥까지 들어올려 벌어낸다 |

모루처럼 단단해 물러서지 않던 상대도 

붉디붉은 열정 앞에 흔들리더니 

싱그러이 솟던 초엽의 초록 버리고 

붉은 심장처럼 팔랑이며 소슬바람 따라 길을 잡는다

이제 가을 밟는 시간 

바랜 낙엽 중에서도 묵직한 것 골라내

황량한 등성마루에 고이 앉히며 

십일월 서릿바람에 다부진 힘을 준다

지나간 봄, 지나간 여름 격렬히 지났으나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아

 남은 나날 아득히 헤아려보며 

회자된 그림자 하나 자꾸만 뒤척인다

시평

이 시는 계절의 전환을 치열한 한 판 승부로 그려낸다. 견고했던 여름을 밑바닥부터 들어 올려 비워내는 과정은 무겁고도 격렬하다. 마침내 붉은 열정으로 물든 가을이 승기를 잡고, 화자는 서릿바람 부는 황량한 등성마루에 낙엽을 앉히며 다가올 11월의 추위를 비장하게 마주한다. 그러나 뜨거웠던 지난 계절이 흔적 없이 사라진 자리엔, 아득한 남은 날들을 헤아리는 허무한 그림자만이 자꾸 뒤척인다. 계절의 역동적인 변화 이면에 깃든 삶의 쓸쓸한 뒷맛을 깊이 있게 포착했다.pajuwiki_ai


코딱지 나물

야생화 융단 위

데구루루 둘러앉은 듯 광대의 윗옷처럼

톱니 박힌 동그란 잎새들 잎겨드랑이마다

살랑이는 숨결 길게 드리운 홍자(紅紫)의 너울.

어느 무대 망설임 없이

기웃거리는가 어린 아이 해맑은 개구진 코딱지처럼

통통한 초록 덩이들 대지에 또르르

광대가 군중을 휘어잡듯 삽시간에 들판을 온통 수놓네.

어느 이름 짓는 자

낯설지 않은 그 낯선 붓끝으로

이토록 밝고 깜찍하며

작은잎꽃수염풀을 빚어냈을까.

여기도 다보록 저기도 다보록 만개한 생명의 축제

봄의 뒤꼍을 아득히 껴안고 하얀 여름 맞으며

이리 까불 저리 까불 흥에 겨워 춤추고

해맑은 웃음 들판에 광대나물. 까르르

생명의 시작부터 주황빛으로 하늘 여무는 녘까지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온몸으로 희열 터뜨리며

가쁜 숨 고루고루 앉히고 낮게 엎드려

대지의 품에 안겨 마음껏 .이름값을 띄운다

시평

‘코딱지나물’이라는 해학적인 이름을 가진 작은 잡초가 들판을 점령해가는 유쾌한 생명력의 현장을 포착한 시다. 시인은 이 앙증맞은 풀들이 번져가는 모습을 마치 아이들의 ‘개구진 코딱지’가 ‘또르르’ 굴러다니며 대지를 수놓는 듯한 재미있는 상상력으로 그려낸다. 낮게 엎드려 땅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온몸으로 ‘까르르’ 희열을 터뜨리며 천진난만하게 춤추는 이 작은 생명들의 축제는 봄의 들판을 명랑한 에너지로 가득 채운다. 하찮게 여겨지는 잡초의 이름값을 톡톡히 띄우는 건강한 생의 찬가다.pajuwiki_ai


하엽이 진다

노랗게 시들어서 잎의 아래쪽 쳐지니

스러져 색 바라고 시간 채워 멈춘 순간

손 뻗어 애닮게 떡잎 갈색빛 툭 내린다

봄기둥 돌아 돌아 울울창창 덮어 내려

여름 속 미색초록 눌리운 두꺼움이

넓은 잎 초꼬슴 모양 내쳐 계절 속 달리다

살포시 몸 기울여 계절에 기대보니

텅 비어 가는 화반 이염되며 가지치기

유일한 잎 통로 지나 돌아오듯 조용하다

*시조

시평

이 연시조는 연꽃 잎이 시들어가는 가을의 풍경을 통해 자연의 순환 섭리를 깊이 있게 관조한다. 첫 수에서 노랗게 색이 바래고 ‘툭’ 떨어지는 잎의 마지막 순간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포착한 후, 둘째 수에서는 봄과 여름의 울울창창했던 초록빛 절정의 시간을 회상하며 계절의 역동성을 대비시킨다. 마침내 격렬했던 시간을 지나 스스로를 비워내는 연못가에서, 화자는 계절에 기대어 모든 것이 본래의 고요한 자리로 되돌아오는 이치를 담담하고 평화롭게 받아들인다. 소멸이 곧 근원으로의 회귀임을 보여주는 성숙한 시선이 돋보인다.pajuwiki_ai


흰 밥과 시인

도서관 강의실, 군중 가득한 곳 무대 한가운데

시인은 접이의자에 앉아 저 먼 수평선을 응시하듯

그림자 하나 없이 초월한 눈빛 길 잃은 배처럼 머무네

종일토록 펄을 탐했던 날들에 대해

파도가 겹겹이 파랑을 물어온 바다에 관해

어머니와 함께 나눴던 설렁탕 속 깍두기 아삭거리는 옛 소리

밀물이 밀려들듯 파삭파삭 온몸에서 퍼져 나오네

방청객의 질문

마이크는 뒷줄의 숨결을 넘어 차례로 이어지고

삶을 지탱하는 본질이 무엇이냐는

묵직한 물음까지 조용히 닿았다

잠시 고요에 잠긴 순간

바닥을 보며 내면으로 침잠하다 입을 여는 시인

저는 시로 생을 이어갑니다 시는 곧 제 존재의 방식이니까요

그 말, 공기 가르고 벽에 부딪혀 공간의 틈새로 파고들며

온몸의 전율 잊혔던 감각처럼 현현(顯現)하는 소름

언어를 캐내려 바다의 지느러미에까지 글을 새기고

세상이 지어 놓은 허망한 허울을 기꺼이 벗었구나

이제 덤덤한 목소리 그사이 간간이 머무는 침묵은

거칠어진 손과 맞잡으며 무릎을 바짝 마주한다

몇 해의 달이 기울고 시인의 모친 잠들었다는 별사

신문 부음 지면에서 무심코 읽는다

문득, 하루를 짓는 그의 땟거리가 염려로 밀려오고

어머니 품을 떠난 시인의 쓸쓸한 하얀 밥

김장철 돌아오자 지인들과 마음 모아

새우깡 종이상자에 정성스레 포기김치 포장 마무리

출판사에 전화 걸어 시인의 주소 아름아름

탄현 우체국에서 빠른 택배로 작은 정을 부친다

시인의 새로운 숨결이 담긴 시집이 나왔다

자기 심장을 세상에 내민 그 어색한 낯섦을 마주할 사람

이 작은 진심 지엽말단(枝葉末端)의 위로 되어

깊은 안식 되길 바라며

고요한 결의가 스민 따끈한 시집 열 권을 품에 안는다.

시평

이 시는 무대 위에서 “시는 곧 제 존재의 방식”이라며 초월적 아우라를 풍기던 시인의 뒷모습을 따뜻하게 응시한다. 화자는 시인의 고결한 언어가 실은 어머니와 함께했던 설렁탕 속 깍두기 소리 같은, 구체적이고 비릿한 삶의 감각에 뿌리박고 있음을 간파한다. 어머니의 부음 소식에 시인의 ‘쓸쓸한 하얀 밥’을 가장 먼저 걱정하며 정성껏 김장을 담그는 행동은, 고단한 창작의 길을 걷는 이에게 건네는 가장 현실적이고 뭉클한 연대다. 예술의 숭고함과 생활의 애달픔이 ‘흰밥’이라는 매개를 통해 따뜻하게 포개진다.pajuwiki_ai


분더카머

뒤적거리다 통째로 와르르 쏟는다

여기 어디 두었더라

어느 페이지에 메모했더라

기억은 가물가물 헛손질만 바쁘다

분명한 것은 언젠가 두었다는 거다

모로 세워놓은 문장 속에도 없다

누군가가 알려주었거나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명징한 단어인데

바쁨에 묻혀서 저 멀리 던져 희미해져 버렸는데

이제야 먼지 툴툴 털어내고 빛을 내보겠다고

기억의 두께를 깨부수는 중이다

차곡차곡 정리해 라벨 작업을 했더라면

이렇게도 처절함에 직면하지 않았을 거다

모두가 다 허술함의 소치다

누굴 탓하겠는가

그저 제 가슴만 탕탕 치면서 분주하기만 하다

언어의 빈곤은 자주 일어나는 일

한 줄 쓰고 단어 공부

한 문장 끄적거리고 유사어 찾기

한 문단 적고 고요함이 물러터질 때까지

소리 내어 읽고 묵독으로 흝어 읽고

온종일 서성거려도 찾아오지 않는

적확한 낱말

무엇부터 세워야 메어있는 낱말을 풀어낼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유려한 시의 골짜기에 다다를까

고심하는 시간 안엔 수많은 시어가 넘쳐서 흘러가 버린다

떠오른 수많은 낱말 이것인 듯 와락 움켜쥔 시어

아닌 듯 손가락 사이로 솔솔 다 빠져나간다

시평

이 시는 시인의 머릿속을 온갖 잡동사니가 뒤섞인 ‘분더카머(진열실)’에 비유하며, 그 혼란 속에서 완벽한 시어를 찾기 위한 고단한 투쟁을 그린다. 화자는 망각의 먼지 더미에 파묻힌 ‘명징한 단어’ 하나를 건져 올리기 위해 기억의 두께를 깨부수는 지난한 과정을 감내한다. ‘언어의 빈곤’에 맞서 유사어를 찾고 묵독을 반복하며 온종일 서성이는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마침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시어들을 바라보는 허탈함은, ‘적확한 낱말’에 도달하고자 하는 창작자의 영원한 갈망과 고뇌를 생생하게 대변한다.pajuwiki_ai

김선희 프로필

김선희 시인

11살 때 쥘 베른의 해저 2만리를 읽으며 책을 만났습니다.

앙드레 지드의 ‘ 나는 한 권의 책을 책꽂이에서 뽑아 읽었다. 그리고 그 책을 꽂아 놓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조금 전의 내가 아니라’라는 말을 신뢰하며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일상이 시처럼 도탑고 보드랍고 때론 선홍색 응결로 다져지길 바라는 고요한 마음을 간직하고자 합니다. 언어도 자부락자부락하며 새로움을 찾아내고자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날마다 구름과 나무와 생애 가장 오래 산 파주를 하나하나 톺아보고 있습니다. pajuwiki_ai


다음 금요산책 예고 2025.12.12. / 내가 만난 수채 캘리그래피 – 고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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