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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몰랐다-김태회

퇴직하면 무얼 할까 하다가 생각한 것이 농사짓는 거였다. 퇴직 한해 전 그러니까 2011년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엇부터 시작해 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농촌에서 태어나 자랐 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막막하진 않았다. 천여 평이나 되는 땅을 모 두 경작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아 이백 평만 짓기로 마음먹었다. 막상 시작하고 보니 전부 할 수밖에 없었다.

김태회 파주작가

그 땅은 원래 논이었는 데 동생이 산 흙을 메꾸어 밭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돌이 많고 땅 힘이 전혀 없었다. 땅 힘을 돋우지 않으면 작물을 심을 수 없었다. 그러니 일부만 손을 댈 수 있겠는가. 아무튼 이 삼 년여 동안 돌을 골라내고 밑거름인 우분牛糞을 수십 차 넣어 지력을 돋우어 제대로 된 밭을 만들었다. 밭 한쪽에는 자그마한 농막도 지어 나름대로 그 럴듯했다. 힘도 들었지만 할만 했다.

이백 평에는 작물을 심는 시기가 서로 다르긴 하지만 상추, 가지, 오이, 호박, 토마토, 참외, 수박, 고추, 옥수수, 마 등을 심고, 나머 지 땅에는 들깨를 심었다. 그래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맨 처 음 일을 시작할 때는 하루 일하고 보름은 앓은 것 같다. 그래도 버 텼는데 하루는 “이게 뭔가!”하고 되돌아보고는 내 힘에 맞게 조정하 는 게 정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루 중 어느 때가 일하기 좋은가 봤더니 새벽과 저녁때였다. 처 음에는 그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워 더운 낮에 일할 때도 있었다. 아 침 일찍 일어나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 어 마음을 다시 먹고 새벽에 일어나 밭으로 향했다. 밭 입구에 도착 하면 밭둑에 심은 꽤 자란 참나무가 먼저 눈에 띈다. 참나무에 앉아 있던 참새 떼가 잠에서 깨어났는지 부산을 떤다. 차에서 내려 농막 으로 걸어가면 밤새 맺힌 이슬이 바짓가랑이와 신을 적시지만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시원하다. 어차피 젖어야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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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주위는 남쪽으로는 훤히 터져 있고 동북서 방향으로는 야트막 한 산과 제법 높은 산으로 둘러쳐져 있다. 건너편 산에서는 뻐꾸기 가 뻐꾹 뻐꾹 운다. 어떨 땐 꾀꼬리도 운다. 밭과 연접한 동쪽 솔숲 속에선 산비둘기가 꾸르륵 꾸르륵 앓는 소리를 낸다. 뻐꾸기와는 느 낌이 사뭇 다르다. 그리고 이름 모를 새들도 뭐라고 지저귄다. 어쨌 든 그들이 떠드는 바람에 쟁골 안이 금방 소란스럽다. 나도 뻐꾸기 를 따라서 “뻐꾹 뻐꾹!” 몇 번 흉내 내어 본다.

어느 날은 이쪽 산과 저쪽 산에서 뻐꾸기와 산비둘기의 울음소리 가 메아리쳐 울려 퍼지는 것이 마치 산골짝 자연 무대에서 오케스트 라를 연주하는 것 같아 나는 한참 그 자리에서 넋을 놓고 있었다. 막 떠오르는 붉은 태양이 동녘으로 숭숭 뚫린 소나무 가장이 사이로 빛을 분사한다.

무대에 출연한 주인공을 비추기 위해 몇 줄기 조명 이 피어오르는 빛 먼지 같아 그 광경이 얼마나 신비롭던지. 더욱이 햇빛 분사량이 점점 많아지면서 상추, 오이, 고추, 들깨 등 잎사귀에 맺힌 이슬방울을 비춘다. 그게 ‘영롱하구나!’라는 걸 새삼 깨닫기도 했다. 나는 오이 하나를 따서 도랑물에 닦아 한입 물어본다. 풋풋하 고 상큼한 맛이라고 할까. 그날은 오감을 다 느낀 날이다.

점심때가 되면 위 공장에 사는 전주 할아버지와 누렁이가 가끔 우리 농막에 마실 온다. 막걸리 한 잔 권하면 참 좋아하신다. 누렁 이겐 오징어 다리를 던져주면 씹지도 않고 꿀꺽 삼키고는 또 달라고 나를 말끄러미 쳐다본다. 앞 농장 부부도 우리 농막에 자주 들린다. 여러 가지 농사 정보를 묻기도 하는데 내가 농사에 달인인 줄 알았 던 모양이다. 아니면 이웃 간에 말을 트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아 주머니는 인터넷으로 미리 숙지하고 와서는 나에게 묻는다. 나중에 는 내가 더 모르는 걸 알았다. 우리는 오가며 친분을 쌓았다.

벌써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때를 되돌아보니 쟁골 골짜기의 광경이 선하 다. 그 밭은 도로가 나면서 없어졌다. 쟁골도 완전히 변했다. 뻐꾸기 를 비롯한 그 새들, 위 공장 할아버지와 누렁이, 앞 농장 부부는 어 디로 갔을까. 아! 앞 농장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지금도 있을 거다. 거기는 수용이 되지 않았으니까.

밭이 없어지고 중국 장가계로 여행 간 일이 있다. 인상이 깊었던 것 중의 하나가 톈먼산天門山이라는 곳에서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한 뮤지컬이었다. 톈먼산 전체가 무대였기 때문에 그 스케일에 놀랐다.

28 – 농사지을 때 쟁골 안에서 뻐꾸기와 산비둘기들이 나를 반기며 대 형 뮤지컬을 공연한 거였다. 그 때는 그걸 몰랐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그랬었구나, 그랬어!”라고 깨달았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 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쟁골로 향했다. 고맙다.

* 2025. 3. 9 옛 농사 짓던 밭을 지나며-


김태회 프로필

  • 파주시 공무원 퇴직
  • 강건너 마을에서 나눈 이야기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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