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장승내 이야기
김태회 파주작가
옥돌내와 청주사씨 이야기

청주사씨 족보에 따르면 중국 산동성山東省 청주靑州 출신 사요史繇가 한국의 중시조始祖다. 그는 명明나라 개국에 공을 세우고 예부상서에 오르며 황제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반역을 꾀했다는 모함을 받고, 1372년(공민왕21년) 고려로 망명 오게 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중에 모든 혐의가 풀려 환국의 길이 트였으나, 귀화의 뜻을 굳혀 파주 월롱 위전리에 터를 잡았다. 이 사실을 안 명明태조가 이李태조에게 조서를 내려 요繇를 명의 유신으로 우대하도록 하였다. 이에 이태조는 그에게 적지 않은 전답과 노비를 내리고 그의 명망에 맞게 후대하였다. 그가 세상을 뜨자 이태조는 애도의 뜻을 표하고 공덕을 기려 주었다. 이런 연유로 그의 후손들은 파주를 토대로 번창했으며, 그의 본 고장인 산동성 청주를 사史씨의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사요에게는 중重과 직直두 아들이 있었는데, 고려로 올 때 그중 장남인 중重만 데리고 와 대를 이었다. 중은 조선조 태종 8년 벼슬길에 나서 세종 10년에는 경상좌도 관찰사를 지냈고, 세종 12년에는 왜구 정벌로 대마도까지 출전했다가 전사하였다. 인조 대에 이르러 병조판서로 추서되어, 파주 오리관면 당산리에 옥석으로 신도비를 세우고 전답과 노비를 하사하는 한편,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중重의 아들 극명克明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례원 판결사에 올랐고, 극명의 아들 의담義淡은 평택 현감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면서 사씨 가문은 뜻밖의 일을 당하게 되었다. 후금이 중국인 귀화자들을 모두 잡아간다는 소문에 자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숨었다. 사씨 가의 하인들이 중重의 옥돌 신도비를 어딘가에 숨겨버리고, 삼대의 무덤을 파헤쳐 흔적을 없애버렸다고 한다. 난리 후 모여든 대부분의 자손들이 삼대 선조의 무덤 대신 월계단月桂壇이라는 영단을 설치하였다. 옥돌비는 지금의 옥돌내라는 위전리 개울가에 버렸다고 하나 끝내 찾지 못하고 전설과 함께 ‘옥돌내’와 ‘사비동史碑洞’이라는 이름만 전한다.
옥석동玉石洞에 얽힌 전설

옥석동은 덕은리 고인돌이 있는 윗동네의 옛 지명으로 마을에 조선 전기의 문신 조연의 이야기가 전해 온다. 조연趙涓(1374∼1429)의 본관은 한양, 자는 여정이다. 태조 누이 정화공주의 아들이니 태조에게는 조카다.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웠고,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이 되었다. 1410년 길주도도안무찰리사로 야인의 침입을 막고, 포로 수십 명을 포획하여 명성을 올렸다. 세종 8년에 우의정을 역임하고, 1429년에 서거하니 임금이 옥석비를 하사하면서 예장(예식을 갖추어 치르는 장사)을 치르게 하였다. 묘소는 덕은리 산 45번지로 그 후 이 마을을 옥석동 또는 옥돌말이라 불렀다.
중종 때 그의 현손 조광조가 왕도정치 및 개혁정치를 펼 때 반대 세력들이 궁중의 오동나무에 ‘走肖爲王’이란 글자 모양으로 꿀을 발라놓았다. ‘走’자와 ‘肖’자를 합치면 ‘趙’자가 되므로 조광조가 왕이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로써 반역의 모함을 받은 조광조는 유배되면서 바로 사사되었다. 이는 조광조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역적의 누명을 쓴 문중은 뿌리까지 뽑힐 지경에 이르렀다. 조상의 묘가 파헤쳐져 부관참시까지 당하게 되자, 옥석비의 주인인 조연의 묘소까지 위험에 처했다.
조씨 문중은 옥석비를 마을 어귀 논 가운데 묻고 뿔뿔이 흩어졌다. 세월이 흘러 끝내 후손들은 조연의 묘소 위치까지 잊게 되었다. 문중에서는 조상을 모시지 못하게 된 것을 몹시 슬퍼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후손이 황해도 어는 고을 군수가 되어 행차하던 중, 파주 지역에서 머물다 밤에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백마를 탄 신령이 나타나 서쪽을 가리키며 “너희가 찾는 묘소가 저기 있다.”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니 눈이 무릎까지 내렸는데, 서쪽으로 말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발자국은 꿈속에서 신령이 말한 방향으로 찍혀 있었다. 발자국을 따라 십 리를 가니 말 발자국은 사라지고 그 앞에 조연의 묘소가 있었다. 자손들은 묘소를 정비하고 숨겨진 옥석비를 찾으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문산천과 고인돌
문산천은 파주와 양주의 경계에 있는 해발 425미터의 꾀꼬리봉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50여 리 흘러 문산 내포리에서 임진강 하류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상류 쪽에서 영장리 고령산에서 발원한 보광천과 중류 쪽에서는 광탄 분수리 박달산에서 발원한 분수천을 흡수한다. 파주읍 부곡리와 월롱 도내리, 위전리, 덕은리를 거친 후, 하류 쪽에서는 법원읍 삼방리 비암산에서 발원한 연풍천과 합류하여 능산리, 문산 내포리를 거쳐 임진강에 도달한다.
문산천은 구간마다 다양한 어종이 서식하여 이를 먹이로 하는 철새들이 많이 찾아온다. 개리, 기러기, 원앙, 쇠오리 등 수많은 철새들이 월동하는 중요한 서식지다. 과거에는 서해 바닷물이 들어오는 임진강과 연결되어 있어 은어와 장어 등이 유입되는 하천이다.
덕은리 주거지 및 고인돌이 왜 거기 있을까? 주로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아 먹던 원시시대에는 사냥감과 물고기가 풍부한 산과 내가 있어야 할 터, 마침 월롱산이 있고 문산천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문산천 바로 옆에 원시시대의 주거지가 있고 무덤도 있는 것이리라. (덕은리 주거지와 고인돌군- 국가사적 제 148호)

문산천과 장승내
내가 현재 알고 어렸을 때 듣던 문산천의 이름은 여럿이다. 나는 장승내라고만 알았다. 나중에 구간마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명칭을 붙인 걸 알았다. 상류에서는 ①벽경수, 광탄천, 넓은여울廣灘이라 하고, 중류인 월롱 쪽에서는 장승내, ②송강개, 옥돌내라고 한다. 하류 쪽에서는 장보포, 문산개라고 한다.
① 벽경소(碧鏡沼): 문산천 상류 광탄면 발랑 2, 3리에 걸쳐 있는 여울. 물살이 바위 밑을 휘돌아 물이 깊고, 거울같이 맑아 붙은 이름이다. 지금은 백경수라고 부른다. 소령 팔경의 하나다.
② 송강교: 장승내를 가로지르는 주요 철도와 도로는 경의선과 통일로다. 통일로에는 월롱교가 있다. 과거에는 월롱교를 송강교라고 했다. 그 옆으로 있는 송강철교는 일제시대에 송강이라는 일본인이 철교를 놓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에 따라 장승내도 송강개 또는 송강내라 불리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통일로에 다리를 놓을 때 ‘송씨’라는 사람이 발동기를 가지고 완공할 때까지 몇 년간 물을 퍼서 송강교라고 했다는데…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무더운 여름 토요일 공부가 끝나고, 집으로 가지 않고 장승내로 멱을 감으로 갔다. 집과는 멀고 물이 깊어 위험한데 왜 거기로 멱 감으로 갔는지는 모르겠다. 장승내 근처에 사는 아이들이 멱 감기 좋다고 자랑을 한 것 같다. 우리 동네에서는 나 말고 형들도 몇이 갔다. 덕은2리 은골 맞은 편인 것으로 추측된다.
가자마자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갔는데, 개울 넓이와 맑은 물 그리고 센 물살은 우리 동네에서는 보지도 못했다. 용상골에 있는 큰 개울이라야 물 깊이가 무릎도 차지 않고 가물기라도 하면 흐르는 물도 시원치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가는 멱 감는 데는 논에 물 대느라 막아 놓은 조그마한 웅덩이가 고작이었다. 거기가 가장 깊은 곳이다. 그러니 장승내를 처음 본 나는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멋도 모르고 물살이 세고 깊은 데로 들어갔는데 순간 쑥 들어가고 말았다. 나는 나오려고 했지만, 나오지 못하고 입으로 물을 거푸 내뿜기만 하면서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몇 번 한 것 같다. 엉겁결에 손을 뻗었는데 동네 형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지금 생각하면 물 깊이가 겨우 어른 배꼽도 차지 않은 곳이었다. 겨우 열 살에 키가 작은 데다가 처음 당하는 일이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래서 칠십이 넘은 지금도 물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왜 장승내인가?
그 장승내가 문산천이라는 것은 성인이 되고, 공적인 명칭을 쓸 때 알게 되었다. 왜 장승내라 했을까? 내가 죽을뻔했던 장승내라는 그 개울이 내 머리에는 문산천이 아니고, 장승내로만 남아있기에 더 궁금한 거다.

다만 세 가지 추측되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하나는 긴 성城과 같은 개울이라 해서 장성長城내라 하는 주장이다. 이는 위전 2리에 있는 은행나무(수령 500년) 뿌리가 냇물까지 길게 뻗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과 상통한다. 또 하나는 파주읍 부곡3리 넓은 마을廣川洞에는 의주로 옛 국도변에 한 쌍의 장승이 있었는데, 홍수 때 마을 앞 하천이 범람하여 장승이 개울로 떠내려갔다 하여 그 후부터 ‘장승내’라고 했다는 주장이다. 물론 홍수에 개울이 넓어졌다(廣灘)는 명칭이 생기면서다.
여기서 장승이 어디에 있었는지 또 의주로 구간 중 신탄막에서 관아가 있는 파주로 가는 도중에 넓은 여울을 건너는 지점이 어딘지를 아는 것이 핵심이라 확신한다. 지금의 도로는 최근에 만들어진 도로로 여겨지는데 산과 지형을 살펴봤을 때 현재의 부곡3리 넓은여울이라 판단된다.


옥돌내에서는 참게가 많이 나왔다고 하는데
옥돌내는 임금님께 진상하는 참게의 본고장이었다. 임진강변에서 번식하고 있는 참게는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산품으로 크고 맛이 좋아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참게들은 서해에서 임진강을 따라 올라와 광탄여울을 지나 소령원이 있는 영장리까지 오르내렸다. 예전에는 샛개울이나 논에서도 어린 참게들을 많이 잡았다. 그중 위전리 앞개울 옥돌내에서 잡는 참게가 특히 맛이 있었다. 밀물 때면 개울에 개흙이 들어와 참게들도 같이 밀려 들어왔다.
가을이면 참게들이 갯내를 토하고 모래사장으로 내려왔는데 모래에 털이 닳아 다리가 깨끗해졌다. 그 게의 맛이 일품이라 임금님께 진상하게 되었다 한다.
출처
- 청주사씨종친회 홈페이지
- 2023 파주마을이야기, 파주문화원
- 파주읍 마을지, 파주시청
- 월롱면 마을지, 파주시청
- 파주군지
- 옛이야기로 친해지는 우리 마을 월롱, 파주여자고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