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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촌집에 나타난 광탄원

광탄원기

원문

고려말 권근의 양촌집에서

廣灘院在兩京間。道里適均。行旅多憩宿。頹垣破礎。無所於寓。判華嚴悟公惻然欲新之。爲捨囊鉢之儲。 重新營構。仍起樓于前。下臨長途。俯瞰平郊。登臨眺 望。洒然可滌塵勞之熱。請予記。予諾而徵始末。悟公 曰。山野受上知久。恩渥最厚。欲爲上祝釐。且報四恩 也。後又謂曰。記要人知耳。吾功德豈在人知不知也。 是不如無記。予又諾而不作。己卯夏。予赴舊京。朝食 于此。因記于楣。以塞前諾。且誌…

번역

광탄원은 서울과 개성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두 도시 간의 거리가 적당히 균등하여 여행자들이 자주 머물며 쉬어가는 곳이었다. 그런데 담장이 무너지고 초석이 깨져서 제대로 머물 곳이 없는 상태였다.

판화엄 오공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새롭게 고쳐 짓기로 했다. 승려로서 모아둔 재물을 기부하여 건물을 새로 지었고, 이어서 앞쪽에 누각도 세웠다. 아래로는 긴 길을 내려다보고 평야를 굽어볼 수 있어서,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면 속세의 번잡함을 씻어낼 만했다.

오공이 나에게 기문 작성을 부탁했고, 내가 승낙한 후 자세한 경위를 물었다. 오공은 “시골에서 오랫동안 임금의 은혜를 받아 그 은혜가 매우 두텁습니다. 임금을 위해 축원하고 또한 네 가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런데 후에 오공(고려시대 원을 관리하는 스님)이 다시 말하기를 “기록이란 사람들이 알게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내 공덕이 어찌 사람들이 아는지 모르는지에 달려 있겠습니까? 차라리 기록하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다시 승낙했지만 글을 짓지는 않았다.

기묘년 여름, 내가 옛 서울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간단히 기록하여 예전에 한 약속을 지키며 이 글을 남긴다.

여담

내용에서 권근과 오공의 다음의 대화가 있었는데도 권근이 기묘년 여름에 다시 기문을 작성했다는 의미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후에 오공이 다시 말하기를 "기록이란 사람들이 알게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내 공덕이 어찌 사람들이 아는지 모르는지에 달려 있겠습니까? 차라리 기록하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다시 승낙했지만 글을 짓지는 않았다.

블로그 어이무사10의 글에 다음 내용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때 오공이 광탄원에서 강원도 석왕사로 옮겼으므로 당사자가 없어 기문을 작성했다는 것으로 보인다.

그때에 오공은 왕명을 받들고 석왕사에 갔으므로, 서로 거리가 천리나 된다. 오공이 이미 남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고, 나도 또한 오공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 하였다.1

  1. https://blog.naver.com/10sunmusa/2223255661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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