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촌집에 나타난 광탄원
광탄원기
원문
고려말 권근의 양촌집에서
廣灘院在兩京間 道里適均 行旅多憩宿 頹垣破礎 無所於寓 判華嚴悟公惻然欲新之 爲捨囊鉢之儲 重新營構 仍起樓于前 下臨長途 俯瞰平郊 登臨眺望 洒然可滌塵勞之熱 請予記 予諾而徵始末 悟公曰 山野受上知久 恩渥最厚 欲爲上祝釐 且報四恩也 後又謂曰 記要人知耳 吾功德豈在人知不知也 是不如無記 予又諾而不作 己卯夏 予赴舊京 朝食于此 因記于楣 以塞前諾 且誌予行 時悟公承命住釋王寺 相距千里 悟公旣不欲人知 予亦不欲悟公知也(『陽村集』 卷13, 記類 廣灘院記)
廣灘院在廣灘岸(『新增東國輿地勝覽』 卷20, 京畿 坡州牧 驛院)
번역
광탄원기 (廣灘院記)
광탄원은 두 서울 사이의 도로에서 거리가 적당히 균등하여 행인들이 많이 쉬어 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무너진 담과 깨진 주춧돌로 인해 머물 곳이 없었다. 판화엄 오공이 측은히 여겨 이를 새롭게 하고자 하여, 자신의 주머니와 발우에 저축한 것을 내어 다시 새로 건축하였다. 또한 앞에 누각을 세워 아래로는 긴 길을 내려다보고 평평한 들판을 굽어보게 하였으니, 올라가 바라보면 상쾌하여 세상 살이의 번거로움을 씻어낼 수 있었다.
오공이 나에게 기록을 부탁하였고, 나는 승낙하여 그 시말을 물었다. 오공이 말하기를 “산야가 임금의 은혜를 받은 지 오래되어 그 은혜가 가장 두터우니, 임금을 위해 복을 빌고 또한 사은에 보답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후에 또 말하기를 “기록은 사람들이 알게 하려는 것인데, 내 공덕이 어찌 사람이 알고 모르는 데 있겠습니까? 이는 기록이 없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또 승낙하였으나 짓지 않았다.
기묘년(1519) 여름, 내가 옛 서울로 가면서 이곳에서 아침을 먹고, 문미에 기록하여 이전 약속을 채우고 또한 내 행차를 기록하였다. 이때 오공은 명을 받아 석왕사에 머물고 있어 거리가 천 리나 되었다. 오공이 이미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지 않으니, 나 또한 오공이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
(『양촌집』 권13, 기류 광탄원기)
광탄원은 광탄 강가에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0, 경기 파주목 역원)
여담
내용에서 권근과 오공의 다음의 대화가 있었는데도 권근이 기묘년 여름에 다시 기문을 작성했다는 의미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후에 오공이 다시 말하기를 "기록이란 사람들이 알게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내 공덕이 어찌 사람들이 아는지 모르는지에 달려 있겠습니까? 차라리 기록하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다시 승낙했지만 글을 짓지는 않았다.
블로그 어이무사10의 글에 다음 내용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때 오공이 광탄원에서 강원도 석왕사로 옮겼으므로 당사자가 없어 기문을 작성했다는 것으로 보인다.
그때에 오공은 왕명을 받들고 석왕사에 갔으므로, 서로 거리가 천리나 된다. 오공이 이미 남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고, 나도 또한 오공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 하였다.1
- https://blog.naver.com/10sunmusa/222325566142 ↩︎